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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9/19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행복한 아이들의 나라
이야기 2007/12/02 16:10
1.
뎅그렇게 놓인 시멘트 건물로, 트레일러들이 몰려왔다. 먼지구름을 매단 채 연달아 멈추어 섰다. 첫째 차량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연신 하품을 했다.
“이게 저희로서는 최선입니다.”
눈물이 다 나오도록 긴 하품 끝에 사내가 한 말은, 무기력한 피로감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이래서야 타산이 맞질 않지요.”
받는 말은, 우울하게 눌러쓴 모자 틈으로 새어 나왔다. 모자는 힘없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햇볕이 낡은 세멘 벽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와 함께 녹아내렸다.
운전수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트레일러에 올라섰다. 시동이 꺼졌다. 운전수는 손에 쇠지깽이를 든 채로 다시 내렸다. 모자는 그가 내리는 것과 때를 맞추어 컨테이너 문 앞으로 걸어갔다. 운전수가 다가와 쇠지깽이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녹이 슨 듯, 문은 매끄럽지 않게 열렸다.
“내려라.”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은 눈이었다. 눈 망울망울마다 눈물이 차올라 촉촉히 젖어있었다..
“내려.”
꼼짝도 하지 않는구나. 운전수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컨테이너에 올라섰다. 제일 안쪽 어둡고 깊은 곳에까지 걸어간 다음, 그 다음, 무언가 밀가루 자루 같은 걸 두드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게 미처 멎기도 전에 희미하게 벗겨진 어둠이 가슴에 안긴 채로 한 아이가 뛰쳐나왔다. 아이는 부러진 팔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마땅히 나와야 할 울음소리는,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이미 목이 잠겨버린 탓이다.
그렇게 하나 둘 뛰쳐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모자는 다시 힘없는 팔짱을 끼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들에게 10월의 태양은 너무 따가웠다.
“이 자식들이!”
모자로서는 그런 모습이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개중에 가장 병약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 냅다 발길질은 해버린다. 맞은 아이는 무어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가서 일렬로 서.”
아이들은 주춤거리면서 줄을 맞추었다. 여전히 쓰라린 햇볕 때문에 움직임이 더뎠다.
운전수가 마지막 아이를 몰아내며 컨테이너에서 내려왔다. 무언가를 오른손에 잡고 질질 끌며 내려왔다. 무언가는 죽어있었다. 여자아이였다.
“굶어 죽은 모양이지?”
모자는 곁눈질로 시체를 보며 말했다. 운전수는 그런 모양이라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던 시체의 손모가지를 놓았다. 무슨 신기한 만화라도 보는 모양으로 시체를 보는 아이들의 눈에, 그 가냘픈 손목은 마치 공중에서 멈추어 버린 듯, 한없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암탉과 병아리처럼 모자는 아이들을 이끌고 세멘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운전수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트레일러에 올라섰다. 먼지를 날리며, 트레일러는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수 대의 트레일러들.
2.
일은 언제나 계획적으로, 침착하게, 치밀하게, 합리적으로 이뤄졌다. 모든 것의 목적은 명확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수행하는 것에 있어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모두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당하게 될 일은, 그러한 정도의 예술적인 계획성이 필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일종의 이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과연.
우선 아이들은 모두 옷을 벗어야 했다. 언제나 시작은 모두를 빨개 벗기는 것이었다. 모든 관리자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자는 특히 이 순간을 좋아했다. 미묘한 기대감으로, 이 때만큼은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두 옷 벗는 일이 끝나면, 관리자들은 아이들에게 하얀 알약을 하나씩 주었다. 알약을 먹은 아이들은, 뱃속 아주 깊은 곳까지를 고통스럽게 모두 게웠다. 게우고 나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므로, 아이들은 대개 배를 끌어 안고 쭈그려 앉아버린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이 난 것이다. 관리자들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서른 평 남짓한 공간에 아이들을 몰아 넣어 가두어 둘 뿐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직, 좀 더 지나면-.
마치 발정난 수캐들처럼, 아이들은 서로의 몸을 탐하여 달려들 것이다. 뒤섞이고 엉킨 팔과 다리들은 벌레처럼 바르작거릴 것이다. 아마, 제일 외로웠던 아이가 시작을 하게 될 것이다. 녀석은, 자신이 받아왔던 모든 설움 따위를 내보이며 연약해 보이는 여자 아이에게 달려들 것이다. 반쯤 빠져버린 머리채를 잡아 뜯고, 녀석은 웃으며 생전 처음 맛보는 해방감에 들뜨지만, 이내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럼, 배가 고픈 녀석은 여자앨, 한입, 뜯어낼 것이다. 피가 튈 것이고, 다른 아이들은 놀람과 찬탄의 눈으로 녀석을 바라볼 것이고, 또 저기서 다른 아이가 공격을 당할 것이고, 이어질 싸움, 난장판, 투쟁, 전쟁, 진흙탕, 아귀다툼, 시궁창, 홍등가, 막힌 골목-.
간단하다. 모자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대개 저희들끼리서 끝을 낸다. 낼 줄 알았다. 그것은 본능이었고, 그런 탓으로, 이런 일에 있어 모자는 자랑스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회사의 로고가 빛나는 모자를 항상 쓰는 것도, 이런 자부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번 달 물량은 꽤 적네요. 아시겠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충분한 수를 확보하는 게 중요해요. 내가 관리부장이 된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죠. 특히 당신, 모자 좀 벗지 그래요? 네, 뭐 정 써야 하겠다면 별 수 없지요. 대신, 내 말은 똑똑히 들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고객들이 원하는 건 쑈에요. 알겠어요? 쑈라는 건, 길고 자극적일수록 인기가 있는 법이지요.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뤄진다는 원칙 아래 이뤄지고 있습니다. 비즈니스가, 이런 소소한 이유로 차질을 빚게 된다는 것은, 시장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되도록 여러 곳에서 물량을 가져오세요! 되도록 다양한 물량을 가져오세요! 몇 번이나 교육을 해야 하는 겁니까.
여러분들도 잘 들으세요. 우리가 아이들에게 알약까지 먹이는 것은, 엄청난 투자입니다. 이 투자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가 분발해야 합니다. 원칙을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더 많은 아이들이 들어올수록, 회사의 수익은 올라갑니다. 이게 다 누굴 위한 겁니까? 예?”
뎅그렇게 놓인 시멘트 건물로, 트레일러들이 몰려왔다. 먼지구름을 매단 채 연달아 멈추어 섰다. 첫째 차량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연신 하품을 했다.
“이게 저희로서는 최선입니다.”
눈물이 다 나오도록 긴 하품 끝에 사내가 한 말은, 무기력한 피로감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이래서야 타산이 맞질 않지요.”
받는 말은, 우울하게 눌러쓴 모자 틈으로 새어 나왔다. 모자는 힘없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햇볕이 낡은 세멘 벽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와 함께 녹아내렸다.
운전수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트레일러에 올라섰다. 시동이 꺼졌다. 운전수는 손에 쇠지깽이를 든 채로 다시 내렸다. 모자는 그가 내리는 것과 때를 맞추어 컨테이너 문 앞으로 걸어갔다. 운전수가 다가와 쇠지깽이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녹이 슨 듯, 문은 매끄럽지 않게 열렸다.
“내려라.”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은 눈이었다. 눈 망울망울마다 눈물이 차올라 촉촉히 젖어있었다..
“내려.”
꼼짝도 하지 않는구나. 운전수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컨테이너에 올라섰다. 제일 안쪽 어둡고 깊은 곳에까지 걸어간 다음, 그 다음, 무언가 밀가루 자루 같은 걸 두드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게 미처 멎기도 전에 희미하게 벗겨진 어둠이 가슴에 안긴 채로 한 아이가 뛰쳐나왔다. 아이는 부러진 팔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마땅히 나와야 할 울음소리는,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이미 목이 잠겨버린 탓이다.
그렇게 하나 둘 뛰쳐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모자는 다시 힘없는 팔짱을 끼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들에게 10월의 태양은 너무 따가웠다.
“이 자식들이!”
모자로서는 그런 모습이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개중에 가장 병약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 냅다 발길질은 해버린다. 맞은 아이는 무어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가서 일렬로 서.”
아이들은 주춤거리면서 줄을 맞추었다. 여전히 쓰라린 햇볕 때문에 움직임이 더뎠다.
운전수가 마지막 아이를 몰아내며 컨테이너에서 내려왔다. 무언가를 오른손에 잡고 질질 끌며 내려왔다. 무언가는 죽어있었다. 여자아이였다.
“굶어 죽은 모양이지?”
모자는 곁눈질로 시체를 보며 말했다. 운전수는 그런 모양이라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던 시체의 손모가지를 놓았다. 무슨 신기한 만화라도 보는 모양으로 시체를 보는 아이들의 눈에, 그 가냘픈 손목은 마치 공중에서 멈추어 버린 듯, 한없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암탉과 병아리처럼 모자는 아이들을 이끌고 세멘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운전수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트레일러에 올라섰다. 먼지를 날리며, 트레일러는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수 대의 트레일러들.
2.
일은 언제나 계획적으로, 침착하게, 치밀하게, 합리적으로 이뤄졌다. 모든 것의 목적은 명확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수행하는 것에 있어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모두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당하게 될 일은, 그러한 정도의 예술적인 계획성이 필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일종의 이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과연.
우선 아이들은 모두 옷을 벗어야 했다. 언제나 시작은 모두를 빨개 벗기는 것이었다. 모든 관리자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자는 특히 이 순간을 좋아했다. 미묘한 기대감으로, 이 때만큼은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두 옷 벗는 일이 끝나면, 관리자들은 아이들에게 하얀 알약을 하나씩 주었다. 알약을 먹은 아이들은, 뱃속 아주 깊은 곳까지를 고통스럽게 모두 게웠다. 게우고 나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므로, 아이들은 대개 배를 끌어 안고 쭈그려 앉아버린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이 난 것이다. 관리자들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서른 평 남짓한 공간에 아이들을 몰아 넣어 가두어 둘 뿐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직, 좀 더 지나면-.
마치 발정난 수캐들처럼, 아이들은 서로의 몸을 탐하여 달려들 것이다. 뒤섞이고 엉킨 팔과 다리들은 벌레처럼 바르작거릴 것이다. 아마, 제일 외로웠던 아이가 시작을 하게 될 것이다. 녀석은, 자신이 받아왔던 모든 설움 따위를 내보이며 연약해 보이는 여자 아이에게 달려들 것이다. 반쯤 빠져버린 머리채를 잡아 뜯고, 녀석은 웃으며 생전 처음 맛보는 해방감에 들뜨지만, 이내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럼, 배가 고픈 녀석은 여자앨, 한입, 뜯어낼 것이다. 피가 튈 것이고, 다른 아이들은 놀람과 찬탄의 눈으로 녀석을 바라볼 것이고, 또 저기서 다른 아이가 공격을 당할 것이고, 이어질 싸움, 난장판, 투쟁, 전쟁, 진흙탕, 아귀다툼, 시궁창, 홍등가, 막힌 골목-.
간단하다. 모자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대개 저희들끼리서 끝을 낸다. 낼 줄 알았다. 그것은 본능이었고, 그런 탓으로, 이런 일에 있어 모자는 자랑스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회사의 로고가 빛나는 모자를 항상 쓰는 것도, 이런 자부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번 달 물량은 꽤 적네요. 아시겠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충분한 수를 확보하는 게 중요해요. 내가 관리부장이 된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죠. 특히 당신, 모자 좀 벗지 그래요? 네, 뭐 정 써야 하겠다면 별 수 없지요. 대신, 내 말은 똑똑히 들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고객들이 원하는 건 쑈에요. 알겠어요? 쑈라는 건, 길고 자극적일수록 인기가 있는 법이지요.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뤄진다는 원칙 아래 이뤄지고 있습니다. 비즈니스가, 이런 소소한 이유로 차질을 빚게 된다는 것은, 시장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되도록 여러 곳에서 물량을 가져오세요! 되도록 다양한 물량을 가져오세요! 몇 번이나 교육을 해야 하는 겁니까.
여러분들도 잘 들으세요. 우리가 아이들에게 알약까지 먹이는 것은, 엄청난 투자입니다. 이 투자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가 분발해야 합니다. 원칙을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더 많은 아이들이 들어올수록, 회사의 수익은 올라갑니다. 이게 다 누굴 위한 겁니까? 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야기 2006/09/19 17:06
아침부터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비몽사몽간에 소년은 몸을 뒤척인다. 자명종 우는 소리는 쉽사리 끊기지 않았다. 소년이 짜증스런 얼굴로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자명종 스위치를 거칠게 눌러버렸을 때까지도, 시계는 째릉째릉 시끄러웠다. 자명종이 그치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년은 더 이상 자명종이 울리지 않는다는 데에 내심 흐뭇해 하며 창문을 바라본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아있지 않아, 창 밖은 푸른 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더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소년은 다시 드러눕는다. 그러나 잠이 잘 오지 않는 듯, 뒤척뒤척하는 품이 영 그렇다. 그래도 깨기는 싫은 모양으로,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한다.
얼추 30분이나 지났을까? 이불 밑에서 소년이 기어나온다. 간밤에 입고 잠든 면바지가 조금 늘어나 있었다. 부엌에서 요란을 떠는 소리가 들린다. 인제 밥하나? 소년은 툴툴거리며 화장실로 멀거니 기어들어 오줌을 눈다. 쫄쫄, 비실비실한 오줌줄기 마냥 소년도 시무룩. 오줌 누인 손을 대충 물에 헹군 소년이 얼굴에 물을 찍어바른다. 차가운 기운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드나 싶더니, 이내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겨울잠이라도 자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소년은 엉뚱하게 자기 방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를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는다. 거울 속 못난 얼굴도 같이 따라 웃는다. 웃는 얼굴에 마치 까치집 모양으로 얽힌 머리가 꽤나 우스꽝스럽다. 소년은 멋쩍은 듯 머리를 조금 긁적이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수도꼭지를 돌려 뜨신 물을 튼다. 그리고는 역시 비장한 얼굴로, 아직도 자길 찾고 있는 어머니를 귓등으로 흘리며,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에 손을 가져다 대어본다. 앗 차거. 아직 보일라 안틀었나? 소년은 소리쳐 엄마를 불러 볼까 하다가 또 한소리 들을 걸 생각해내고는 말아버린다. 그리고 차갑은 물줄기에 까치집 얹힌 머리를 들이민다. 처음엔 떡진 머릴 타고 물이 조금 흘러내리더니, 이내 머릿칼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든다.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확실히 이건 옳지 않아. 아무튼 머리에 물을 묻혀버린 까닭으로 소년은 묵묵히 머리를 감았다. 바깥에서 얼다말았는지 꽤나 차가운 물에 머리를 문대려니 목 언저리가 굳어오는 양, 머리를 감는 소년이 고개를 이상하게 뒤튼다.
밥상머리에 앉은 소년이 찬 물이 쏟아지는 수도에 관해 불평하려니, 어머니는 바쁘다며 난리다. 소년은 잔소리로 여기고 흘려듣다, 제 눈으로 시계를 보곤 토끼눈이 되어 밥을 입에 퍼넣는다. 아, 썅. 오늘 학원 늦으면 벌자 남는데! 어쨌든간에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므로 소년은 더욱 다급한 표정이 되어 미처 다 먹지도 않은 밥을 물리고 옷을 챙겨입는다. 간밤에 가방을 미리 챙겨두지 않는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따라 왜이리 챙길 게 많아 보이는지. 소년은 혀를 내두르며 가방을 챙기고, 잘 닫기지 않는 가방 지퍼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나서 집을 나선다. 단출한 타워형 아파트에-타워팰리스 씩이나 되면은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생긴 건 모난 상자곽 같을 뿐인-, 그것도 일층 현관이라 아침엔 썩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어머닌 속이 타는 모양으로 소년의 등짝을 두드리며 어서 가라고 소릴 빽뺵 지른다. 왠지 언젠가는 경비가 찾아오든, 윗층 할머니가 내려오든 일이 날 테지. 속으로 되뇌는 소년이었지만, 이런 생각은 식순간에 사라졌고, 셔틀 버스가 오는 동네 상가 앞으로 뛰어나가는 동안엔 그저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셔틀 시간에 늦지 않았다. 떠나려 하는 차를 아슬아슬하게 잡아타는데, 앞자리 앉은 여자아이들이 민망하게 쳐다보는 통에 소년은 괜시리 얼굴을 붉혔다. 너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늦느냐는 둥, 기사님은 오늘도 꼬장이다. 소년은 그저 들은 척, 예, 예, 알겠습니다, 안 늦을게요, 한 다음 기사에게 씨익 웃어준다. 기사는 여전히 궁시렁댄다. 소년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40인승 버스의 상석,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풀었다. 어디보자. 오늘 숙제가 뭐였드라? 잠시나마 학구열에 불타는 듯, 가방을 뒤적이던 소년은 이내 포기해버리고 다시 가방을 닫아버린다. 파카 입고 나오길 잘했군. 소년은 두툼한 파카 속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다시 잠이 온다. 졸립다. 존다.
한참을 잔 것 같아, 눈을 떠보니 아직도 셔틀버스는 달리고 있다. 노선이 조금 바뀐 듯, 창 밖 풍경이 낯설다. 그러나 이내 익숙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와 함께 소년의 얼굴은 굳어지고, 아이들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한다. 덤덤한 표정으로 소년은 그들을 바라본다. 이윽고 버스가, 40인승 버스가, 샛파란 40인승 버스가, 샛파란 ㅊㅅ학원 40인승 학생수송 버스-수송이라니! 대한의 학생들은 진정 죄수 내지는 짐짝에 다름없는 것이다-가 멈춰선다. 운전석 창 쪽으로 길가에 늘어선 다른 샛파란 학생수송버스들과 그 버스에서 걸어나가는 짐짝들이 보인다. 걸어가는 모습들 하곤. 소년도 어느새 그들과 같은 표정을 하고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무슨 약에 취한듯, 그들은 웅성웅성, 엉기적엉기적, 뒤죽박죽으로 섞여 건물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간다. 완전 B급 좀비영화잖아!
아주. 아주. 아주. 재밌다. 당췌 무슨 말을 떠들어 대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년은 웃겨 죽겠습니다- 라는 심보가 되어 있었다. 국어 시간인가. 아니면 영어 시간일지도 모르지. 그닥 길지도 않은, 좌우로 길죽하게 찢어진 강의실이어서 대놓고 졸 수는 없었다. 때문에 소년은 네 손가락을 짝 붙여 만든 차양으로 눈 앞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따끔씩 앞에서 말하는 소리가 그치거든 연필을 부여잡고, 다시 말소리가 들리면 차양 밑으로 눈을 감는다. 언제나 처럼.
시간이 많이 흐른 듯, 지겨움이 치밀어 올르자, 소년은 차양을 풀고 선생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어시간이었나. 칠판에 잔뜩 휘갈겨 놓은 글씨들이 어지럽다. 영어 선생은, 다른 종합학원 선생들이 다 그렇듯이, 되도 않는 발음을 굴리며 아이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젠 써먹지도 못할 성문 종합 영어를 고집스레 가르치는 꼴이라니. 정말 융통성 하난 꽝이군. 소년은 생각한다. 툴툴, 샤프를 돌리는 손놀림이 불만스럽다.
갑작스럽게, 놀랍게,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린다.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든다. 영어 선생은 인사도 받지 않고 나가버린다. 칠판은 아직도 어질러진 모양 그대로다. 괜히 놀랐군. 소년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일어선다. 의자가 뒤로 밀치며 득득거리는 소리가 난다. 듣기 싫은 소리. 그러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조금 뒤 소년이 돌아와 자리에 앉은 다음, 연해서 들린 종소리는 분명 듣기 좋은 클래식. 그러나 모두가 싫어하는 소리였다. 십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소년은 스스로 한심함을 느끼며 느적느적 책을 꺼낸다. 이번 시간은 수학인가?
가로로 셀쭉한 강의실에 수학 선생님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인사를 한다. 아이들도 인사를 한다. 선생님이 출석을 부른다. 아이들은 대답한다. 선생님이 책을 펼친다. 아이들도 책을 펼친다. 선생님이 답을 부른다. 아이들이 점수를 매긴다. 선생님이 틀린 문제를 묻는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다. 아이들이 판서된 내용을 적는다. 선생님이 말을 한다. 아이들이 듣는다. 선생님이 숙제를 낸다. 아이들이 숙제를 받아 적는다. 종이 친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간다. 아이들은-.
역시 소년은 깜짝 놀랐다. 소년은 일어난다. 교실을 나간다. 교실에 돌아온다. 소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가로로 셀쭉한 강의실에 국어 선생님이 들어온다. 아직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직도 아이들은 출석 부르는 소리에 넷, 넷, 대답을 한다. 아이들을 부르는 선생님 목소리에 힘이 없다. 아직도 아이들은 책을 펼친다. 선생님이 책을 펼친다. 아직도 아이들은 판서를 받아 적는다. 국어 선생님이군. 글씨가 예쁘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관심이 없는 모양으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아직도 재미없는 수업이다.
아직도 소년은 종소리에 깜짝 놀란다. 아이들은 놀라지 않는다. 강의실은 여전히 가로로 길쭉하다. 그러나 시간은 깜짝 놀랄만큼 늘어나 있었다. 점심시간인 것이다. 소년은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선다. 다음 시간에는 아랫층에 있는 큰 강의실에서 자습을 하기 때문에 가방을 놔두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뭘 좀 사먹어야 겠군. 중얼거리며 소년이 강의실을 나섰을 때, 저기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여어, 밥사먹자." 놈들이 지껄인다.
잿빛으로 하늘이 흐렸다. 사람들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왠지 텅 빈 듯 쓸쓸할 뿐인 거리다. 역시 횟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흐리멍텅한 자동차들이, 또한 흐리멍텅한 연기를 내뿜으며, 언제나 흐리멍텅할 뿐인 사람들의 눈에 비친다. 그 비치는 모습 역시 흐리멍텅, 멍텅구리 같이 굴러가는 꼴이다.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걷는다. 무엇이 그리들 바쁜 건지, 다들 발에 불이 붙은 모양으로 급하다. 툭. 툭. 소년은 길을 걷는 와중에 자꾸만 채인다. 이 쪽에서 밀어대는 아줌마, 저 쪽에서 뻐팅기는 아저씨. 그러나 사람들은 소년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소년은 단지 움직이는 장애물일 뿐이다. 장애물은, 없어지는 게 좋지.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진 모양이다. 그냥 놔둬도 보기 좋을 텐데.
그렇게 이리저리 떠밀려, 그리고 동무들에 이끌려 소년은 분식집으로 들어선다. 끼릭거리는 문을 열자, 안에서 훈훈한 냄새가 이야깃소리에 묻혀 흘러나온다. 얼은 바람을 이끌고 소년이 그 안으로 들어가니 몇이 이 쪽을 바라본다. 소년은 짐짓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본다. 시간은 2시 XX분. 이런. 아직 넘치고 넘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시 그를 잡아끄는 아이들을 따라 소년은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이 앉기엔 조금 작아 보이는 탁자였다. 가방 놓을 데가 없네. 그러므로 소년이 몸을 돌려 뒤에 놓인 의자를 끌어 끌러놓은 가방을 얹는다. "어라, 거기 자리 있어." 바로 날아오는 대답이니, 무정하기 짝이 없다. 소년은 멋쩍게 미안하다며 도로 가방을 든다. 묵직한 가방은 소년의 다리 밑에 처박힌다.
한 놈이 나발나발하며 주문을 한다. 그걸 듣는 아저씨 표정이 미묘하다. 그러나 음식이 나오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신 음식. 좋군. 이걸로 오천원이네. 음식을 먹는 와중에 소년은 주머니 속에 들은 돈을 만지작거린다. 모자라면 빌려 써야 겠군. 그는 생각한다.
어떻게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후닥닥 해치워버린 라면 맛이 아직도 입안에서 껄끄럽다. 소년은 혀를 이리저리 굴려 이빨에 문대보며 주위를 둘러본다. 놈들은 약간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느적느적 걷는다. 이상하게도 밥을 먹고 나온 사이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처럼, 길거리가 한산하게 느껴졌다. 좀 전에 느꼈던 잿빛으로 얼어붙은 거리는 간데 없었고, 지금 소년이 느끼는 거리는 그저 평범한 회갈색이었다. 역시 사람은 밥을 잘 챙겨먹어야지. 할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을 떠올린 소년이 빙긋이 웃는다. 녀석들은 아직도 앞서서 걷는다. 무엇이 그리들 재밌는지 손짓 발짓을 하며 되도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소년은 짐짓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 본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를 꺼내는 법은 없는 것이, 녀석들은 그저 게임, 게임, 게임을 연달아 외칠 뿐이다. 딱히 해줄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이내 소년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는 듯, 다시 사방을 돌아본다. 주욱 훓는 시선에는 머리를 이상하게 물들인 여자아이, 검은 옷을 입은 어른들, 할아버지, 트름하는 아저씨, 불량스러 뵈는 형씨들. 쓰잘데기 없는 녀석들, 소년은 그렇게 되뇌이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함부로 사람을 재단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이미지를 그들은 다만 갈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 섰을 때에, 시간은 아직도 20여분이나 남아 있었다. 정말이지, 쉬는 시간은 짧고 점심 시간은 길고. 소년은 괜히 불만에 찬 표정이 되어 강의실에 자리를 잡는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 큰 강의실에 가방만 잔뜩 쌓인 게 사람은 뵈이질 않는다. 저쪽 구석에서 수다를 떠는 여자아이들이 시끄럽다. 소년은 책상 한쪽을 모두 덮은 가방을 이리로 밀어 놓은 뒤에 자기 가방을 그 곳에 턱 올려 놓는다. 쿵, 무거운 소리가 들린다. 소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가방을 연다. 지익, 지퍼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방이 쩍 벌어진다.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한 가방이었다. 소년은 그 곳에 손을 들이밀어 억척스럽게 수학문제집 한 권과 영어 원서를 꺼낸다. 그러고 나자 가방은 조금 홀쭉해진듯, 쩍 벌어진 게 조금 다물려진다. 그러나 가방을 내려놓는 소년의 손길은 여전히 무겁다. 이젠 자습이나 해 볼까. 소년은 MP3 Player를 꺼내 귓구녕에 이어폰을 꽂아 넣는다. 하얀 이어폰, 네모난 MP3, MP3엔 노래가 아주 많았다. 소년은 조금 갈등하는 듯 싶더니 이내 노랠 고른 듯 MP3를 주머니에 집어 넣고 의자를 조금 당겨 않는다. 책상에는 영어 원서가 펼쳐졌다. 소년은 엄지와 검지로 눈깔 사이를 꾹 눌르더니 한번 비벼보고 안경을 벗어든다. 안경 닦이가 어디있더라. 소년은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더니 조금 빛이 바랜 안경 닦이를 꺼내든다. 하아아. 경에 입김을 불고, 안경 닦이로 그걸 힘주어 문질러 닦는다. 안경알이 말끔해졌다. 소년은 안경을 쓰고 만족스러운 듯 엷게 웃는다. BOOM, BOOM,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소년은 MP3를 꺼내 음량을 조금 줄인다. 그리고 펼쳐놓았던 원서를 들여다본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들이 줄줄이 강의실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아이들, 남자아이들, 그리고 도저히 10대로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녀석들까지 모두가 한자리씩 꿰차고 앉자 식순간에 강의실은 시끄러워졌다. 북적북적한 분위기에 음악이 묻혀버렸는지, 소년은 MP3를 다시 꺼내 볼륨을 꽤나 크게 높인다. 쿵짝쿵짝, 시끄러웠지만 듣기는 좋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렸다. 자습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다. 소년은 여전히 종소리에 놀란다. 제길. 정말 싫단 말이야. 소년이야 어떻든 얄미운 스피커는 몇 초인가 그 소리를 내뱉다 그친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실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강의실에 들어선다. 녹색 청테이프로 둘둘 감은 넙적한 매를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다들 눈치껏 공부하고, 눈치껏 시험 치고, 눈치껏 죽겠지. 그들이 사뭇 한심하다고 여기던 소년은 다음 순간 자신도 별다르지 않음을 깨닫고는 괜히 언짢다. 언짢은 기분은 영어 원서와 씨름한 자습 시간 세 시간 내내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뜬금없이, 종소리. 그 소리를 듣는 아이들 얼굴에는 웃음 꽃이 핀다. 자습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소년 역시 새삼 들뜨는 기분을 느끼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저 쪽 끝에서 부터 아이들이 밀려나가는 가 싶더니, 식순간에 강의실은 텅 비어 버린다. 남아서 자습을 하겠다는 아이들만이 듬성듬성 떨어져 않았을 뿐이다. 소년은, 그러나, 더 이상 남아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단호히 강의실을 박차고 나선다. 바로 앞서서 친구놈들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복도에 꽉 차있었다. 이런. 조금 있다가 나올 걸 그랬나. 잠시 주춤하던 소년은 그 흐름에 뛰어든다. 내가 걷는 건지, 밀려 가는 건지. 다들 덩치가 산만해서 계단조차 잘 보이질 않는다. 소년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어쩌랴. 그나저나 학원 장사는 정말 잘 되나 보군. 이것들이 모두 두당 오륙십을 받는단 이야기지? 나도 나중에 학원이나 차려볼까. 소년은 생각한다. 그렇게 북적북적하다 보니 어느새 건물 밖이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역시나 가히 좀비와 다름없는 괴이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삼삼오오 헤어진다. 소년 또한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버스가 기다리는 길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5호.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읽으려고 소년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버스는 미끄러지듯이 천천히 들어와서 소년을 조금 지나쳐 멈춰섰다. 그는 천천히 걸어 버스에 탄다. 애들은 별로 없었다. 아직 다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다. 소년은 두세번째 좌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풀고, MP3를 꺼내 음악을 튼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외로움과 슬픔과 어두움. 지친 몸을 누인 자리가 불편하다. 그러나 소년은 잠자코 앉아서 음악에 귀를 귀울인다. 창 밖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다. 자동차. 사람. 오토바이. 자전거. 자동차. 가로등. 점점히 박힌 가로등 불빛이 이쁘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그러나 가로등은 너무나 빨리 지나쳐, 금새 소년이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얼추 30분이나 지났을까? 이불 밑에서 소년이 기어나온다. 간밤에 입고 잠든 면바지가 조금 늘어나 있었다. 부엌에서 요란을 떠는 소리가 들린다. 인제 밥하나? 소년은 툴툴거리며 화장실로 멀거니 기어들어 오줌을 눈다. 쫄쫄, 비실비실한 오줌줄기 마냥 소년도 시무룩. 오줌 누인 손을 대충 물에 헹군 소년이 얼굴에 물을 찍어바른다. 차가운 기운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드나 싶더니, 이내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겨울잠이라도 자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소년은 엉뚱하게 자기 방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를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는다. 거울 속 못난 얼굴도 같이 따라 웃는다. 웃는 얼굴에 마치 까치집 모양으로 얽힌 머리가 꽤나 우스꽝스럽다. 소년은 멋쩍은 듯 머리를 조금 긁적이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수도꼭지를 돌려 뜨신 물을 튼다. 그리고는 역시 비장한 얼굴로, 아직도 자길 찾고 있는 어머니를 귓등으로 흘리며,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에 손을 가져다 대어본다. 앗 차거. 아직 보일라 안틀었나? 소년은 소리쳐 엄마를 불러 볼까 하다가 또 한소리 들을 걸 생각해내고는 말아버린다. 그리고 차갑은 물줄기에 까치집 얹힌 머리를 들이민다. 처음엔 떡진 머릴 타고 물이 조금 흘러내리더니, 이내 머릿칼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든다.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확실히 이건 옳지 않아. 아무튼 머리에 물을 묻혀버린 까닭으로 소년은 묵묵히 머리를 감았다. 바깥에서 얼다말았는지 꽤나 차가운 물에 머리를 문대려니 목 언저리가 굳어오는 양, 머리를 감는 소년이 고개를 이상하게 뒤튼다.
밥상머리에 앉은 소년이 찬 물이 쏟아지는 수도에 관해 불평하려니, 어머니는 바쁘다며 난리다. 소년은 잔소리로 여기고 흘려듣다, 제 눈으로 시계를 보곤 토끼눈이 되어 밥을 입에 퍼넣는다. 아, 썅. 오늘 학원 늦으면 벌자 남는데! 어쨌든간에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므로 소년은 더욱 다급한 표정이 되어 미처 다 먹지도 않은 밥을 물리고 옷을 챙겨입는다. 간밤에 가방을 미리 챙겨두지 않는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따라 왜이리 챙길 게 많아 보이는지. 소년은 혀를 내두르며 가방을 챙기고, 잘 닫기지 않는 가방 지퍼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나서 집을 나선다. 단출한 타워형 아파트에-타워팰리스 씩이나 되면은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생긴 건 모난 상자곽 같을 뿐인-, 그것도 일층 현관이라 아침엔 썩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어머닌 속이 타는 모양으로 소년의 등짝을 두드리며 어서 가라고 소릴 빽뺵 지른다. 왠지 언젠가는 경비가 찾아오든, 윗층 할머니가 내려오든 일이 날 테지. 속으로 되뇌는 소년이었지만, 이런 생각은 식순간에 사라졌고, 셔틀 버스가 오는 동네 상가 앞으로 뛰어나가는 동안엔 그저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셔틀 시간에 늦지 않았다. 떠나려 하는 차를 아슬아슬하게 잡아타는데, 앞자리 앉은 여자아이들이 민망하게 쳐다보는 통에 소년은 괜시리 얼굴을 붉혔다. 너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늦느냐는 둥, 기사님은 오늘도 꼬장이다. 소년은 그저 들은 척, 예, 예, 알겠습니다, 안 늦을게요, 한 다음 기사에게 씨익 웃어준다. 기사는 여전히 궁시렁댄다. 소년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40인승 버스의 상석,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풀었다. 어디보자. 오늘 숙제가 뭐였드라? 잠시나마 학구열에 불타는 듯, 가방을 뒤적이던 소년은 이내 포기해버리고 다시 가방을 닫아버린다. 파카 입고 나오길 잘했군. 소년은 두툼한 파카 속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다시 잠이 온다. 졸립다. 존다.
한참을 잔 것 같아, 눈을 떠보니 아직도 셔틀버스는 달리고 있다. 노선이 조금 바뀐 듯, 창 밖 풍경이 낯설다. 그러나 이내 익숙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와 함께 소년의 얼굴은 굳어지고, 아이들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한다. 덤덤한 표정으로 소년은 그들을 바라본다. 이윽고 버스가, 40인승 버스가, 샛파란 40인승 버스가, 샛파란 ㅊㅅ학원 40인승 학생수송 버스-수송이라니! 대한의 학생들은 진정 죄수 내지는 짐짝에 다름없는 것이다-가 멈춰선다. 운전석 창 쪽으로 길가에 늘어선 다른 샛파란 학생수송버스들과 그 버스에서 걸어나가는 짐짝들이 보인다. 걸어가는 모습들 하곤. 소년도 어느새 그들과 같은 표정을 하고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무슨 약에 취한듯, 그들은 웅성웅성, 엉기적엉기적, 뒤죽박죽으로 섞여 건물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간다. 완전 B급 좀비영화잖아!
아주. 아주. 아주. 재밌다. 당췌 무슨 말을 떠들어 대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년은 웃겨 죽겠습니다- 라는 심보가 되어 있었다. 국어 시간인가. 아니면 영어 시간일지도 모르지. 그닥 길지도 않은, 좌우로 길죽하게 찢어진 강의실이어서 대놓고 졸 수는 없었다. 때문에 소년은 네 손가락을 짝 붙여 만든 차양으로 눈 앞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따끔씩 앞에서 말하는 소리가 그치거든 연필을 부여잡고, 다시 말소리가 들리면 차양 밑으로 눈을 감는다. 언제나 처럼.
시간이 많이 흐른 듯, 지겨움이 치밀어 올르자, 소년은 차양을 풀고 선생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어시간이었나. 칠판에 잔뜩 휘갈겨 놓은 글씨들이 어지럽다. 영어 선생은, 다른 종합학원 선생들이 다 그렇듯이, 되도 않는 발음을 굴리며 아이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젠 써먹지도 못할 성문 종합 영어를 고집스레 가르치는 꼴이라니. 정말 융통성 하난 꽝이군. 소년은 생각한다. 툴툴, 샤프를 돌리는 손놀림이 불만스럽다.
갑작스럽게, 놀랍게,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린다.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든다. 영어 선생은 인사도 받지 않고 나가버린다. 칠판은 아직도 어질러진 모양 그대로다. 괜히 놀랐군. 소년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일어선다. 의자가 뒤로 밀치며 득득거리는 소리가 난다. 듣기 싫은 소리. 그러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조금 뒤 소년이 돌아와 자리에 앉은 다음, 연해서 들린 종소리는 분명 듣기 좋은 클래식. 그러나 모두가 싫어하는 소리였다. 십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소년은 스스로 한심함을 느끼며 느적느적 책을 꺼낸다. 이번 시간은 수학인가?
가로로 셀쭉한 강의실에 수학 선생님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인사를 한다. 아이들도 인사를 한다. 선생님이 출석을 부른다. 아이들은 대답한다. 선생님이 책을 펼친다. 아이들도 책을 펼친다. 선생님이 답을 부른다. 아이들이 점수를 매긴다. 선생님이 틀린 문제를 묻는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다. 아이들이 판서된 내용을 적는다. 선생님이 말을 한다. 아이들이 듣는다. 선생님이 숙제를 낸다. 아이들이 숙제를 받아 적는다. 종이 친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간다. 아이들은-.
역시 소년은 깜짝 놀랐다. 소년은 일어난다. 교실을 나간다. 교실에 돌아온다. 소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가로로 셀쭉한 강의실에 국어 선생님이 들어온다. 아직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직도 아이들은 출석 부르는 소리에 넷, 넷, 대답을 한다. 아이들을 부르는 선생님 목소리에 힘이 없다. 아직도 아이들은 책을 펼친다. 선생님이 책을 펼친다. 아직도 아이들은 판서를 받아 적는다. 국어 선생님이군. 글씨가 예쁘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관심이 없는 모양으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아직도 재미없는 수업이다.
아직도 소년은 종소리에 깜짝 놀란다. 아이들은 놀라지 않는다. 강의실은 여전히 가로로 길쭉하다. 그러나 시간은 깜짝 놀랄만큼 늘어나 있었다. 점심시간인 것이다. 소년은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선다. 다음 시간에는 아랫층에 있는 큰 강의실에서 자습을 하기 때문에 가방을 놔두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뭘 좀 사먹어야 겠군. 중얼거리며 소년이 강의실을 나섰을 때, 저기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여어, 밥사먹자." 놈들이 지껄인다.
잿빛으로 하늘이 흐렸다. 사람들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왠지 텅 빈 듯 쓸쓸할 뿐인 거리다. 역시 횟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흐리멍텅한 자동차들이, 또한 흐리멍텅한 연기를 내뿜으며, 언제나 흐리멍텅할 뿐인 사람들의 눈에 비친다. 그 비치는 모습 역시 흐리멍텅, 멍텅구리 같이 굴러가는 꼴이다.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걷는다. 무엇이 그리들 바쁜 건지, 다들 발에 불이 붙은 모양으로 급하다. 툭. 툭. 소년은 길을 걷는 와중에 자꾸만 채인다. 이 쪽에서 밀어대는 아줌마, 저 쪽에서 뻐팅기는 아저씨. 그러나 사람들은 소년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소년은 단지 움직이는 장애물일 뿐이다. 장애물은, 없어지는 게 좋지.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진 모양이다. 그냥 놔둬도 보기 좋을 텐데.
그렇게 이리저리 떠밀려, 그리고 동무들에 이끌려 소년은 분식집으로 들어선다. 끼릭거리는 문을 열자, 안에서 훈훈한 냄새가 이야깃소리에 묻혀 흘러나온다. 얼은 바람을 이끌고 소년이 그 안으로 들어가니 몇이 이 쪽을 바라본다. 소년은 짐짓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본다. 시간은 2시 XX분. 이런. 아직 넘치고 넘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시 그를 잡아끄는 아이들을 따라 소년은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이 앉기엔 조금 작아 보이는 탁자였다. 가방 놓을 데가 없네. 그러므로 소년이 몸을 돌려 뒤에 놓인 의자를 끌어 끌러놓은 가방을 얹는다. "어라, 거기 자리 있어." 바로 날아오는 대답이니, 무정하기 짝이 없다. 소년은 멋쩍게 미안하다며 도로 가방을 든다. 묵직한 가방은 소년의 다리 밑에 처박힌다.
한 놈이 나발나발하며 주문을 한다. 그걸 듣는 아저씨 표정이 미묘하다. 그러나 음식이 나오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신 음식. 좋군. 이걸로 오천원이네. 음식을 먹는 와중에 소년은 주머니 속에 들은 돈을 만지작거린다. 모자라면 빌려 써야 겠군. 그는 생각한다.
어떻게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후닥닥 해치워버린 라면 맛이 아직도 입안에서 껄끄럽다. 소년은 혀를 이리저리 굴려 이빨에 문대보며 주위를 둘러본다. 놈들은 약간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느적느적 걷는다. 이상하게도 밥을 먹고 나온 사이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처럼, 길거리가 한산하게 느껴졌다. 좀 전에 느꼈던 잿빛으로 얼어붙은 거리는 간데 없었고, 지금 소년이 느끼는 거리는 그저 평범한 회갈색이었다. 역시 사람은 밥을 잘 챙겨먹어야지. 할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을 떠올린 소년이 빙긋이 웃는다. 녀석들은 아직도 앞서서 걷는다. 무엇이 그리들 재밌는지 손짓 발짓을 하며 되도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소년은 짐짓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 본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를 꺼내는 법은 없는 것이, 녀석들은 그저 게임, 게임, 게임을 연달아 외칠 뿐이다. 딱히 해줄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이내 소년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는 듯, 다시 사방을 돌아본다. 주욱 훓는 시선에는 머리를 이상하게 물들인 여자아이, 검은 옷을 입은 어른들, 할아버지, 트름하는 아저씨, 불량스러 뵈는 형씨들. 쓰잘데기 없는 녀석들, 소년은 그렇게 되뇌이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함부로 사람을 재단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이미지를 그들은 다만 갈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 섰을 때에, 시간은 아직도 20여분이나 남아 있었다. 정말이지, 쉬는 시간은 짧고 점심 시간은 길고. 소년은 괜히 불만에 찬 표정이 되어 강의실에 자리를 잡는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 큰 강의실에 가방만 잔뜩 쌓인 게 사람은 뵈이질 않는다. 저쪽 구석에서 수다를 떠는 여자아이들이 시끄럽다. 소년은 책상 한쪽을 모두 덮은 가방을 이리로 밀어 놓은 뒤에 자기 가방을 그 곳에 턱 올려 놓는다. 쿵, 무거운 소리가 들린다. 소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가방을 연다. 지익, 지퍼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방이 쩍 벌어진다.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한 가방이었다. 소년은 그 곳에 손을 들이밀어 억척스럽게 수학문제집 한 권과 영어 원서를 꺼낸다. 그러고 나자 가방은 조금 홀쭉해진듯, 쩍 벌어진 게 조금 다물려진다. 그러나 가방을 내려놓는 소년의 손길은 여전히 무겁다. 이젠 자습이나 해 볼까. 소년은 MP3 Player를 꺼내 귓구녕에 이어폰을 꽂아 넣는다. 하얀 이어폰, 네모난 MP3, MP3엔 노래가 아주 많았다. 소년은 조금 갈등하는 듯 싶더니 이내 노랠 고른 듯 MP3를 주머니에 집어 넣고 의자를 조금 당겨 않는다. 책상에는 영어 원서가 펼쳐졌다. 소년은 엄지와 검지로 눈깔 사이를 꾹 눌르더니 한번 비벼보고 안경을 벗어든다. 안경 닦이가 어디있더라. 소년은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더니 조금 빛이 바랜 안경 닦이를 꺼내든다. 하아아. 경에 입김을 불고, 안경 닦이로 그걸 힘주어 문질러 닦는다. 안경알이 말끔해졌다. 소년은 안경을 쓰고 만족스러운 듯 엷게 웃는다. BOOM, BOOM,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소년은 MP3를 꺼내 음량을 조금 줄인다. 그리고 펼쳐놓았던 원서를 들여다본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들이 줄줄이 강의실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아이들, 남자아이들, 그리고 도저히 10대로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녀석들까지 모두가 한자리씩 꿰차고 앉자 식순간에 강의실은 시끄러워졌다. 북적북적한 분위기에 음악이 묻혀버렸는지, 소년은 MP3를 다시 꺼내 볼륨을 꽤나 크게 높인다. 쿵짝쿵짝, 시끄러웠지만 듣기는 좋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렸다. 자습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다. 소년은 여전히 종소리에 놀란다. 제길. 정말 싫단 말이야. 소년이야 어떻든 얄미운 스피커는 몇 초인가 그 소리를 내뱉다 그친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실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강의실에 들어선다. 녹색 청테이프로 둘둘 감은 넙적한 매를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다들 눈치껏 공부하고, 눈치껏 시험 치고, 눈치껏 죽겠지. 그들이 사뭇 한심하다고 여기던 소년은 다음 순간 자신도 별다르지 않음을 깨닫고는 괜히 언짢다. 언짢은 기분은 영어 원서와 씨름한 자습 시간 세 시간 내내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뜬금없이, 종소리. 그 소리를 듣는 아이들 얼굴에는 웃음 꽃이 핀다. 자습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소년 역시 새삼 들뜨는 기분을 느끼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저 쪽 끝에서 부터 아이들이 밀려나가는 가 싶더니, 식순간에 강의실은 텅 비어 버린다. 남아서 자습을 하겠다는 아이들만이 듬성듬성 떨어져 않았을 뿐이다. 소년은, 그러나, 더 이상 남아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단호히 강의실을 박차고 나선다. 바로 앞서서 친구놈들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복도에 꽉 차있었다. 이런. 조금 있다가 나올 걸 그랬나. 잠시 주춤하던 소년은 그 흐름에 뛰어든다. 내가 걷는 건지, 밀려 가는 건지. 다들 덩치가 산만해서 계단조차 잘 보이질 않는다. 소년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어쩌랴. 그나저나 학원 장사는 정말 잘 되나 보군. 이것들이 모두 두당 오륙십을 받는단 이야기지? 나도 나중에 학원이나 차려볼까. 소년은 생각한다. 그렇게 북적북적하다 보니 어느새 건물 밖이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역시나 가히 좀비와 다름없는 괴이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삼삼오오 헤어진다. 소년 또한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버스가 기다리는 길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5호.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읽으려고 소년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버스는 미끄러지듯이 천천히 들어와서 소년을 조금 지나쳐 멈춰섰다. 그는 천천히 걸어 버스에 탄다. 애들은 별로 없었다. 아직 다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다. 소년은 두세번째 좌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풀고, MP3를 꺼내 음악을 튼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외로움과 슬픔과 어두움. 지친 몸을 누인 자리가 불편하다. 그러나 소년은 잠자코 앉아서 음악에 귀를 귀울인다. 창 밖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다. 자동차. 사람. 오토바이. 자전거. 자동차. 가로등. 점점히 박힌 가로등 불빛이 이쁘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그러나 가로등은 너무나 빨리 지나쳐, 금새 소년이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